지금, 여기, 또다시 이상은은 ‘흐른다.’  이상은 EP [fLoW]

데뷔한 지 삼십 년도 넘는 세월 동안 이상은의 음악 여정은 분명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스타 엔터테이너로서의, 바빴지만 힘겨웠던 시절을 단호히 등지고, 동양과 서양의 심상과 풍미를 접합하여 작가 또는 예술가로서의 지위도 부여 받았다는 평가를 이 글에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이상은은 음악적 실험이나 거대한 질문들을 잠시 내려놓는다. 좁고 우스운 이 땅에 내려오지 않는 ‘새’가 될 필요도 없고, 삶과 죽음의 경계지인 ‘삼도천’을 기웃거리지도, 거칠고 황량한 ‘사막’을 방황하지도 않는다. ‘지도에 없는 마을’이나 ‘제3의 공간’을 찾아나서는 ‘코스모폴리탄 보헤미안’으로서의 분주한 여정을 이어가지 않아도 된다. 아시아를 횡단하는 상상력으로부터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던 시절이 이상은의 한 기점이었다면, 이제 이상은은 또 다른 기착지를 향한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5집 [Lulu](2014)는 또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레이블을 만들고 DAW 프로그램들을 독학하고 편곡자와 연주자의 도움 없이 거의 모든 작업을 혼자만의 힘으로 완성했다. 

이러한 도전을 기반으로 열여섯 번째 앨범 [fLoW]에서는 다양한 조력자들의 손길을 모았는데, 이규호(푸른곰팡이 소속의 싱어송라이터), 강이채(이채언루트, 바이올린 연주자 및 싱어송라이터), 이능룡(전 언니네이발관, 나이트오프 멤버), 박성도(원펀치 멤버, 싱어송라이터, 영화 <미성년> 음악감독) 같은 한국 대중음악의 실력파 뮤지션들과 조우했다. 세계적인 뮤지션들과 작업해온 강효민 엔지니어(브릭월사운드 스튜디오)와의 협업도 중요한데, 입체적인 사운드를 직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 모던록, 포크, 팝, 일렉트로니카 등 다채로운 색감들도, 동양적 음계의 운용과 여백을 살린 궤적도 유연하고 살갑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정갈하고 따뜻하고 편안하다. 그건 쉬이 얻어진 결실이 아니다. 한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다른 마음을 열어놓는다.

이상은은 ‘RELAX’를 통해, 급변하는 세상 속에 조금은 천천히 가고, 조금쯤 내려놓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건반과 피아노가 리드하는 이규호의 다감한 편곡에 이상은의 포근한 목소리가 스며든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작하는 ‘일상 노마드’는 여행자 이상은이 권하는 “우리 동네 여행기”다. “뒤뜰 있는 카페”와 “놀이터”를 순례하며 만나는 거리의 풍경을 통해 우리의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한다.

기타, 만돌린 등이 따뜻하게 일렁이는 ‘가을 수채화’는 깊어가는 가을 풍경을 삶의 깊이로 치환시킨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전주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시작하는 ‘넌 아름다워’는 말하자면 이상은 버전의 ‘You Are So Beautiful’. 귀에 감기는 구절과 이능룡의 경쾌한 편곡이 돋보인다. 거친 “삶의 파도”속에 휩쓸려가는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마음을 따라가”라고 응원한다.

‘FLOW’에 이르면, 사람들이나 세상의 비바람에 상처 입은 이들에게 지금 자체에 몰두하라는, 이 순간을, 오늘을 안아보라는 처방을 내린다.

마지막 곡은 강이채의 서늘하고도 아름다운 현악과 공간감 있는 타악이 공명하는 ‘오아시스의 밤’으로, 인생이라는 사막 속에서 진짜 우물을 발견하기를 희망한다. 

이상은은 이렇게 노래의 힘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노래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 몰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응원하고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음을 그의 음악은 증명한다. 이건 진부하지만 진실이다. 이상은의 음악은 그래서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나지막이 속삭인다. “너의 곁에 항상 있었어”(‘RELAX’), “정말 수고했어”(‘일상 노마드’)라고.

지금, 여기, 또다시 이상은은 ‘흐른다.’

-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